내가 물리를 해야만 하는 이유는 뭘까?
물리가 내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물리가 내 사고방식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나?
내가 물리를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것과 포기해야 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생각을 해놓으면 앞으로 생길 선택에서 망설임 없이 선택 할 수 있을것 같은데.
1강 정리 - 자연과 경이
종교를 뜻하는 영어단어 religion은 ‘함께 묶는다’라는 라틴어에서 비롯한다. 따로따로 떨어진 것들을 이어 붙인다는 뜻인데, 표면적으로는 따로따로 떨어진것처럼 보이는 사물들 사이의 근원적인 상호 관계를 추구한다.
칼세이건은 단어의 본래 의미로부터 보았을 때에 과학과 종교의 목표는 거의 동일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가지 분야에서 진리에 접근하는 방식과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의 신빙성을 입증하는 방식이 다르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언제 어디에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Albert Einstein “나는 우주적 종교의 감정이야말로 과학 탐구에서 가장 강력하고 가장 고귀한 동기라고 생각한다”
우주는 주로 無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뭔가가 있는 것이 오히려 예외라는 사실을 이해해야한다.
은하수 너머에 있는 외부 은하의 수는 최소한 수억 개, 어쩌면 수백억 개에 달할 수도 있다. 그 각각의 은하에는 우리 은하에 비견할 만한 수의 별들이 포함되어 있는것이다. 이게 과연 얼마나 많은 별들을 의미하는지 덧셈을 해본다면 상당한 크기의 수임을 알 수 있다. 대략 1에다가 0을 23개나 붙인 것과 비슷할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태양은 그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것은 우주 속 우리의 위치를 짐작하는데 유용하다.
우주의 어마어마한 규모를 고려하면, 표면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그 어떤 종교도 성립할 수 없으며, 특히 서양 종교(ex.카톨릭) 같은 것은 결코 성립할 수 없다.
수많은 종교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을 아주 크게 만들려고 노력한 바 있다. 칼세이건은 그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스스로를 매우 작게 느끼도록 하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갖고있었다. 하지만 만약 그들의 목표가 바로 그것이었다면 굳이 허접한 우상들을 만들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작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싶다면 그저 하늘을 올려다보면 되기 때문이다.
이같은 경험을 하고 나면 많은 사람들이 결국 종교적 감수성이 불가피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Ann Druyan이 지적한 바에 따르면, 이른바 불멸의 창조주는 정의상 잔인한 신일 수밖에 없다. 왜냐면 그분 자신은 결코 죽음의 공포에 직면하지 않음에도, 그런 공포에 직면하는 피조물들을 수없이 많이 창조했기 때문이다. 그분은 왜 그래야만 했을까? 그분이 진정으로 전지전능했다면, 좀 더 너그럽게 피조물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함으로써,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해주었어야 했을 것이다. 그분이 창조한 우주에서는 최소한 상당 부분이, 어쩌면 그 우주 전체가 결국 죽고만다.
우주를 그저 흘끗 쳐다보기만 하더라도, 전통적인 종교에 대한 다른 도전들을 얼마든지 더 찾아볼 수 있다.
대부분의 서양 신학이 가진 일반적인 문제는 바로 하느님을 너무나도 작게 묘사한다는 점이다. 이 신은 작은 세계의 신에 불과하고, 은하의 신도 못되며, 나아가 우주의 신이 되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존재이다.
신이 이처럼 하나의 작은 세계에 국한된 존재라는 문제야말로, 신학자들이 아직까지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 문제가 아닐까?
칼세이건이 우리의 이런 한계를 기뻐해야만 마땅하다고 주장하는것은 아니다. 하지만 칼세이건은 우리가 얼마나 많이 모르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하게 많다. 반면 우리가 아는 것은 극히 조금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가 이해하는 것들 덕분에, 우리는 저 경외감이 드는 우주와 맞대면할 수 있는 것이다.
우주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겸손 부족을 드러내는 것일까? 칼세이건도 우주와 대면할 때 겸손이야말로 유일하게 정당한 반응일 것이라는 데에는 동의를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겸손이 우리가 경외하는 우주의 본성을 탐구하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봤다. 우리가 그런 본성을 탐구한다면, 우주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무지나 자기 기만이 아니라, 진실에 근거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창조주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가령 그가 그녀나 그분이나 그것이나 또는 다른 적절한 대명사로 불리게 될 그 존재는, 과연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주제에 예배를 드리고 완고한 고집쟁이들을 더 선호할까? 칼세이건은 과학이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지적 예배라고 생각했다.
칼세이건이 마음속 깊이 지녔던 믿음은 다음과 같았다. 전통적인 부류의 신이 존재한다면 우리의 호기심과 지능은 바로 그런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 틀림없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우주와 우리 자신을 탐구하려는 우리의 열정을 억압하는 행동은 신의 선물을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그런 전통적인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호기심과 지능은 극도로 위험한 시기에 우리를 살아남게 해 줄 중요한 도구가 되리라는 것이다.
어떤 경우가 되었든, 우리는 과학 없이 우리의 앎을 확장할 수 없다. 종교는 이러한 과학과 함께 가야만 한다. 과학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종의 안녕에 필수적인 도구일 것이기 때문이다.